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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학살 현장...아이, 노인, 임산부 가리지 않고 죽였다

‘빨갱이’로 몰아 일가·친척·이웃 몰살…체포·구타·고문 예삿일, 목격자 공포에 숨죽여

등록일 2018년03월05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배방읍 중리 유해발굴 현장에서는 8~9세 아이의 정강이뼈 아래에서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구슬이 발견됐다. 아이 유해 위에서는 다량의 탄피와 탄두가 나왔다. 아이 유해 아래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유해가 뒤엉켜 있다. 사진제공: 충언련 심규상

“설 묻어서 땅 밖으로 사체 일부와 옷가지 등이 나와 있었다. 그 주변에서 어린아이가 하루 이틀 울다가 죽었다.” 증언1
“산에 칡뿌리를 캐러 갔는데 신발과 옷가지가 방공호를 따라 일렬로 쭉 50미터 가량 늘어져 있었다. 묻었던 사체들이 드러난 것이다.”- 증언2
“나무하러 간 아이가 성재산 방공호에는 가기가 무섭다고 했다. ‘거기에 가면 삐져나온 해골바가지가 대단히 많이 있었다’고 늘 말했다.”- 증언3

한국전쟁 당시 아산에서도 억울하고 끔찍한 죽음이 있었다. 아산에서는 1950년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를 들어 민간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부역자로 지목된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 이웃들이 제대로 된 진상조사나 재판도 없이 무참하게 총살당했다.

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목격자 증언과 각종 자료를 근거로 분석한 결과 아산시에서만 80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전쟁 당시 총살당해 산골짜기에 방치됐던 유골들이 67년 만에 양지로 나왔다.

드러난 유골들이 당시 민간인학살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아이를 감싸 안은 채 총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형태의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목격자 증언 중에는 죽은 어머니와 가족들 주변에서 밤새 울던 아기가 지치고 굶주려 죽기도 했다고 전한다.

또 뒷수습을 하지 않은 채 철수해 산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이후에도 나무꾼 등에 의해 수십 미터에 널부러진 해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각종 증언과 향토사, 행정자료 등을 토대로 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발표한 자료를 정리했다.

대대적인 부역자 색출

1950년 9월26일(음력 8월15일) 미군 기갑사단이 대전과 조치원을 차례로 수복하고 북진중이었다. 이들이 천안을 통과해 서울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식이 아산지역에 퍼졌다. 그러자 인민위원회와 내무서 등에서 사무가 중지됐고 지하활동을 하던 반공단체들이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 9월26일 천안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산군 탕정면을 시작으로 9월27일에는 서쪽 예산방향 도고면에 이르기까지 좌익 측 사무가 중단됐다. 아산군의 중심지인 온양읍을 비롯해 염치면, 탕정면 등 동북부지역에서 먼저 치안대가 조직돼 부역자 체포가 시작됐다.

그러나 아직 군·경의 복귀는 이뤄지지 않았고, 우익무장조직들은 신창고개와 도고면 등 서남부지역에서 퇴각하는 인민군 및 좌익세력들과 백병전을 치렀다. 1950년 9월29일(음력 8월18일) 온양읍에 입성한 미군은 신창면을 거쳐 선장면, 도고면까지 진출한 후 1950년 10월1일(음력 8월20일) 천안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아산군 전역에서 치안대가 조직됐고 혼란이 야기될 정도로 부역자들에 대한 처리가 자행됐다. 온양경찰서가 복귀된 것은 1950년 10월4일(음력 8월23일)이다. 통상 본대 진주 수일 전 선발대가 들어왔는데 인근 천안경찰서의 경우 선발대는 1950년 10월1일, 본대는 10월4일에 복귀했다.

음봉지서 경찰에 따르면 아산지역은 온양경찰서 선발대로 음봉지서에 복귀했을때 좌익에 의해 사살된 순경 시신 3구를 수습했고 일주일 후 본서로부터 정상적인 지휘가 가능했다. 그러므로 온양경찰서 선발대는 1950년 9월29일경 미군과 함께 아산지역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아산지역 부역자 처벌은 1950년 9월26~27일 미군이 천안을 지나던 무렵부터 각 읍·면 치안을 맡았던 치안대에 의해 시작돼 1950년 9월29일 온양경찰이 복귀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온양 금광구덩이에서 살해된 사람들

온양읍 방축리 3구의 김갑봉, 감갑영, 김갑만 형세는 집 뒤 방공호에서 은신도중 1950년 10월3일(김갑영, 김갑만)과 10월4일(김갑봉) 치안대원 십여 명에 의해 방축1리 점촌의 그릇굽는 가마에 감금됐다.

인민군점령기 김갑영은 동네 반장을, 감갑봉은 아산군인민위원회에서 서기를 맡았고, 김갑만은 온양호텔에 근무했었다. 김갑봉 형제가 연행된 후 김갑영의 처 오씨는 그릇 굽는 가마로 밥을 두 번 날랐다. 처음 갔던 10월5일 김갑봉과 김갑영을 면회했지만 두 번째는 보초 서던 자들이 밥을 두고 가라고 해서 면회를 하지 못했다.

감금장소에 세 번째 갔을 때, 김갑봉 형제가 온양경찰서로 이송됐다는 말을 듣고 10월6일 온양경찰서에 면회를 갔지만 거절당했다. 며칠 후 오씨는 온양경찰서에 근무했던 친척으로부터 김갑봉 형제가 온양경찰서로 이송됐다는 것은 거짓이며 ‘온양 금광구덩이’에서 살해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1950년 10월초 신창면 실옥리의 이애기는 치안대에 두 번 연행됐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애기는 해방되던 해에 남편을 잃고 떡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는데 수복 후 대한청년단에 연행됐다. 아들 김석희는 이애기가 감금됐던 청년단 사무실로 밥을 5번 나르면서 면회했다고 진술했다. 이애기는 감금 10일 동안 고문에 의한 거짓부역혐의를 자백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날 저녁 이애기는 다시 연행됐다가 살해당했다.

이애기의 친정은 충무공 자손으로 염치면 백암리 덕수 이씨 집안이다. 전쟁 당시 사촌오빠인 이응렬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돼 있었고 그 가족들은 좌익활동가가 많았다. 특히 이애기의 친오빠 이명렬은 염치면분주 소장으로 활동했다가 수복 후 처형됐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애기의 아들 김석희는 어머니가 좌익세력과 공모해 대한청년단원의 부친을 해치려 했다는 혐의로 대한청년단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고 진술했다.

1950년 10월초 온양읍 좌부리의 성유봉은 인민군 점령시기 누이 성유분이 인민위원회에서 심부름을 했다는 이유로 연행되려 할 때 막아섰다가 동생 대신 온양경찰서로 연행됐다. 당시 총소리를 들었던 동네 어른들로부터 온양경찰서에 수감됐던 사람들이 성재산 방공호에서 ‘집단총살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성유봉이 온양경찰서로 이송되자 모친이 면회를 갔는데 당시 수백명의 사람들이 갇혀 있었고 면회는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성유봉을 비롯해 온양경찰서에 갇혀있던 수 백명의 사람들이 성재산 방공호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재산, 경찰트럭에 사람 한가득 실어간 후 총성

1950년 10월 중순 선장면 궁평리 최홍신은 도고면 이모댁으로 피신했다가 치안대에 의해 체포돼 온양경찰서로 연행됐다. 1950년 10월 말 최홍신의 여동생 최정숙은 사식을 넣어주기 위해 경찰서에 갔지만 오빠를 만나지 못했다. 그 무렵 배방면 남리(당시 탕정면 구령리 성재산 앞마을 돌장원 옆)에 살던 최정숙은 밭일을 하러 나갔다가 온양경찰서에서 트럭에 실려 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다음은 최정숙의 증언이다.

“온양경찰서에서 사람을 가득 실은 트럭이 성재산 앞마을로 왔습니다. 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트럭을 목격한 횟수는 5~6번은 되는 것 같습니다. 차로 사람들을 나른 다음에는 총소리가 들렸고 ‘만세’ 소리도 들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워 총소리가 크게 들렸고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어두울 때 사람을 싣고 지나가더니 총소리가 났습니다. 누군가 삽을 달라고 해서 줬습니다.”

같은 무렵 온양경찰서 사찰계에 근무했던 이씨는 경찰서와 200~300미터 거리인 양조장 앞에서 부역자들을 가득 태운 ‘지무시(GMC)’가 배방면 ‘성재산 앞마을 돌장원’을 수차례 오갔다고 진술했다. 또 성재산 방공호와 5리 거리의 좌부리에 살던 성창봉도 수복시기 매일 총성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1950년 수복 후 온양읍 좌부리, 방축리, 실옥리를 비롯한 아산군 일대에서 치안대에 의해 온양경찰서로 이송된 부역혐의자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 온양경찰서 유치장뿐만 아니라 경찰서 뒷마당까지 구금됐다. 당시 온양경찰서 수사계에 근무했던 임씨에 의하면 매일 밤 트럭으로 40~50명의 부역자들을 처형장소인 배방면 남리 성재산 방공호로 실어다 처형했다고 한다. 방공호는 인민군 점령기에 조성된 것으로 현재 그 자리에 들어선 신도리코 공장과 크라운제과 공장을 둘러 2㎞ 정도의 규모였다.

진술들을 종합하면 9·28수복 시기 배방면 성재산에서 희생된 사람은 최소 200명에 이른다. 성기환은 아버지 성유봉의 유해매장지는 찾을 수 없었지만 1955년 성재산 방공호에 간 적이 있다며 다음같이 진술했다. “산에 칡뿌리를 캐러 갔었는데 신발과 옷가지가 방공호를 따라 일렬로 쭉 50미터 가량 있었습니다. 묻었던 사체들이 드러난 것입니다.”

최정숙도 집단희생장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가 거두어 키우던 피난 온 머슴아이를 시켜 나무를 해오라고 했는데, 그 아이가 나무를 해오면서 성재산 방공호에는 가기가 무섭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가면 삐져나온 해골바가지가 대단히 많이 있었다’고 늘 말하곤 했습니다.”

이장비리 폭로하자 일가족 끌고가 ‘몰살’

이와 같은 민간인 희생의 가해자는 온양경찰 및 경찰의 지시를 받은 의용경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등 치안대였다. 온양경찰은 사찰계에서 주도해 부역혐의자를 체포·구금·조사·처벌했다.

각 지서에서는 본서에서 파견된 사찰경찰이 지서주임 및 소속순경 등과 함께 부역자를 분류해 처벌했다. 부역혐의자 체포는 주민들의 증언 혹은 밀고로 이뤄졌고 조사과정에서는 구타, 전기고문 등이 따랐다.

그런데 체포된 사람들 중 부역과 무관한 사람들도 적지 않아 억울하게 휩쓸려 죽은 살람도 많았다. 부역혐의자들의 처형은 상부의 지시가 있기도 했지만 경찰서장의 재량으로 이뤄지는 부분이 적지 않았고 희생규모도 온양경찰서장 및 해당 지서주임의 재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었다. 처형이 집행될 때는 경찰 1명의 인솔로 치안대원들이 부역혐의자들을 처형지로 끌고 가 총살했다. 이러한 부역자 체포·살해는 1951년까지 계속됐다.

1950년 12월 초 배방면 북수리 4구 김석남은 온양경찰서에 수감됐다가 살해됐고 그 가족들은 경찰에 의해 배방면사무소 창고로 연행된 후 살해됐다. 김석남은 1949년 좌익 활동을 했던 성낙구의 부친과 함께 북수리 이장 곽세영이 공출을 착복한 사실에 대해 소를 제기해 갈등이 생겼다.

이후 전쟁이 나고 수복이 되자 청년방위대 소대장인 곽세영의 사위 정모씨가 김석남과 그 가족을 ‘빨갱이’로 몰았고 김석남은 이러저리 피해 다니다가 1950년 11월 말 임모씨의 집에 이틀 머문 후 온양경찰서에 자수했다.

이후 12월 초 김석남의 아들 김장성은 온양경찰서 통신계에 근무하던 외삼촌 최만덕으로 부터 부친의 희생 소식을 들었다. 같은 시기 온양경찰서에 수감됐던 유모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수감자 수십명이 동시에 사라진 적이 있는데 모두 희생당했다. 김석남이 온양경찰서에서 살해됐던 12월 초 김석남의 처 최일순과 딸 김정희, 딸 김정순, 아들 김기성은 도민증을 발급해 준다던 경찰에 의해 면사무소 창고로 연행됐다가 살해됐다.

이와 함께 의용군으로 징집나간 이장 방씨의 가족 5명, 의용군으로 징집된 부친을 둔 성낙구 가족 4~5명, 엄진섭과 그 처도 살해당했다.

임산부·어린이 포함 양씨일가 10명, 전씨일가 12명 참변

1951년 1월초 배방면 장자리에서는 양대운과 처 이만순, 딸 양춘자, 아들 양구창, 아들 양춘호, 딸 양영순, 임신 중이던 양대운의 동생 양대록의 처 윤순희, 그의 자녀인 유아 2명 등은 장재리 주민들과 함께 도민증을 받기 위해 배방면사무소로 갔다가 일가족 10명 모두 참변을 당했다.

양대운과 양대록이 인민군 점령시 부역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양대록·양대운 가족들의 연행을 목격했던 양대운의 장인 이종구는 1951년 음력 3월 조치원에서 신청인 양봉임의 모친에게 장재리 가족 희생소식을 전했다.

1951년 1월5일 배방면 세교리 1구 전달석과 모친 유씨, 동생 전 유, 형 전윤옥, 형수 박씨, 조카 전해달·전해광, 형 전준옥, 형수 심씨, 조카 전해자·전해종, 미작명 영아 1명 등 가족은 도민증을 발급해 주고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 주겠다는 경찰의 지시를 받고 나갔다가 배방면사무소 창고에 감금됐다. 목격자들은 전달석의 형 전윤옥과 전준옥의 인민위원회 활동경력 때문에 일가족 12명이 살해됐다고 했다.

아산지역 부역혐의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최소 8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생존자 증언을 토대로 발굴한 민간인학살자 유골매립지 현장.

창고에 가둔 채 발가벗기고 때리고 야만의 현장

“설 묻어서 땅 밖으로 사체 일부와 옷가지 등이 나와 있었다. 그 주변에서 어린아이가 하루 이틀 울다가 죽었다.”

배방면 창고는 면사무소와 나란히 있던 지서 뒤 곡물창고 2개와 배방역전 창고 1개를 통칭하는 것으로 1·4후퇴시기 배방면민들이 감금된 곳이었다. 부역혐의자 가족들은 별도로 관리하고, 도민증 발급을 이유로 은밀히 야간에 연행됐다. 감금기간은 보통 2~3일 정도였는데 1950년 12월 창고 보초를 섰던 임씨는 면내 주민들이 밤에 연행돼 왔고 불복하면 맞거나 발가벗겨지는 것을 목격했다. 임씨가 보초를 섰던 당시에는 40~50명의 주민들이 갇혀 있었으며 부녀자, 노인, 유아는 물론 영아까지 포함돼 있었다.

참고인 전씨는 1951년 1월초 치안대원들이 도민증을 발급해 줄 것이니 이장 집으로 모이라고 해서 배방면 주민 60~70명이 지서 뒤 창고로 연행돼 감금됐다고 증언했다. 생존자와 목격자에 따르면 “사람들이 저녁에는 ‘장날 소떼 엮듯이’ 새끼줄로 묶인 채 끌려가 배방면 성재산 방공호에서 총살당했다”고 했다. 

1951년 1월5일 저녁 세교리 전달석과 그 가족, 세교리 주민 30여 명이 연행돼 총살당했다. 이때 전유, 전해천, 김병학 등 세교리 주민과 서울에서 피난왔던 이광수는 처형장소로 가던 중 도망쳐 생존했다.

1951년 1월7~8일 배방면 향토방위대가 면내 10여 개 마을에서 “도민증이 없는 사람은 도미증을 발급받고 시국이 시국인 만큼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 주겠다”며 남녀노소 300여 명을 면 곡물창고에 집합시킨 후 저녁에 ‘뒷산 성재산’으로 새끼줄로 묶어 끌고가 총살시켰다고 생존자 맹석재는 증언했다.

당시 희생자들은 가족단위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유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유족이 있더라도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다. 따라서 시신수습은 이뤄질 수 없었다.

임씨는 1951년 봄 성재산 아래 자신의 논으로 농사지으러 갔을 때 방공호에 시신이 가득한 것을 목격했다. “설 묻어서 땅 밖으로 사체 일부와 옷가지 등이 나와 있었다. 그 주변에서 어린아이가 하루 이틀 울다가 죽었다” 임씨는 당시 시체 썩는 냄새가 지독해 일을 하지 못했고, 결국 그 땅을 팔아버렸다.

1·4후퇴 당시 세일폐금광에서 집단살해

1·4후퇴 시기에는 성재산 방공호 뿐만 아니라 성재산과 마주한 설화산 아래 세일폐금광 또한 집단살해장소로 사용됐고 희생규모도 매우 컸다.

1951년 1월6일 저녁 8시 배방지서 순경 한정우는 향토방위대장 한상익과 공모해 ‘좌익분자 및 가족’ 183명을 창고에 예비검속하고 전원 총살한 후 부근 ‘금광굴혈’에 사체를 유기했다. ‘금광굴혈’은 배방면 세일 폐금광을 가리키는 것으로 금을 채굴하던 시기 ‘금방앗간’이 있었던 중리3구에 뒷산에 있다 하여 ‘뒷터골’ 이라고 불렀다.

폐금광 희생자들은 주로 온양, 배방, 신창 주민이었고 시체를 매장할 때는 중3리 청년들이 동원됐다. 당시 배방면사무소에 근무했던 맹씨에 의하면 1·4후퇴 시기 온양경찰서로부터 배방지서와 면사무소, 각 이장에게 부역자와 그 가족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한다.

1·4후퇴 시기 배방면 창고에 감금됐던 주민들은 성재산 방공호에서 살해되기도 했고 중리3구 정미소로 옮겨져 살해된 후 폐금광에 매장되거나 폐금광에서 살해되기도 했다. 참고인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희생된 주민 수는 200~3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아산 부역혐의 희생자 ‘최소 800명’

아산지역 부역혐의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최소 8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진실규명대상자가 희생된 지역에 대한 조사결과며 진실규명이 신청되지 않은 지역은 통계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아산지역 희생자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인 진술에 따르면 희생규모가 가장 컸던 배방면은 9·28 수복시기 최소 200여 명, 1·4후퇴 시기 300여 명이 희생당했다. 그 외 신창면 150여 명, 탕정면 90여 명, 염치·선장면에도 수십 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희생자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진실규명을 신청한 61명 중 59명과 신청하지는 않았지만 조사결과 희생자로 신원이 확인된 18명으로 모두 77명이다.

아산사건의 희생자는 크게 9·28 수복 시기와 1·4후퇴 시기로 구분된다. 수복시기에는 주로 부역혐의를 받았던 당사자들이 체포·살해당했다. 후퇴시기에는 부역혐의자 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함께 살해당했다.

희생자들의 성별 분포는 남성 48명, 여성 28명이다. 이들 중 10세 미만 어린이가 14명(남아 6명, 여아 7명, 성별미상 1명) 포함됐다. 이는 부역자 살해가 뚜렷한 혐의나 기준 없이 무차별적으로 진행됐음을 증명한다.

이정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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