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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지옥이 따로 없었다”…아산시 민간인학살 최소 ‘800명’

<한국전쟁 아산시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일가‧친척‧이웃까지 ‘몰살’…목격자 증언, “빨갱이 씨를 말려라”

등록일 2019년04월05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2018년 3월, 배방읍 중리 유해발굴 현장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것으로 보이는 유해가 발굴됐다.

아산지역 민간인학살은 800여 명으로 공식 추산하고 있으나 이보다 크게 웃돌 것으로 보인다.

“어설프게 묻은 사체 일부와 옷가지 등이 땅 밖으로 노출돼 있었다. 그 주변에서 어린아이가 밤새 울다 지쳐 죽었다.” 증언1
“산에 칡뿌리를 캐러 갔는데 사체가 방공호를 따라 일렬로 늘어져 있었다. 시신이 나뒹굴고 악취가 진동했다.”- 증언2
“산에 나무하러 간 아이가 너무 무섭다고 도망쳤다. 곳곳에 삐져나온 해골바가지가 너무 많았다고 했다.”- 증언3

2018년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에서 208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이 자리에서 부녀자들이 착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비녀만 89점이 나왔다. 그 주변에는 구슬 등 아이들 장난감이 다수 발견됐다. 감식결과 어린이 유해만 58구로 확인됐다. 성인남성은 19명에 불과했다. 작년 봄 설화산에서는 부녀자와 아동, 노인 가리지 않고 학살당했던 참혹한 현장이 그대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는 주로 20~30대 남성이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산시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사건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하고 끔찍한 현장이었다.

1950년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북한군 부역혐의로 지목받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 이웃들이 진상조사나 재판도 없이 무참하게 총살당하고 흉기에 찔려 죽었다. 당시 산골짜기에 방치됐던 유골들이 67년 만에 양지로 나왔다. 드러난 유골들은 민간인학살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민간인학살공동조사단에 따르면 아산시에서 최소 80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했다. 아산시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해발굴이 계속될 예정이다. 올해 4월 말부터 유해발굴이 예정된 탕정면과 염치읍에서는 최소 160여 명의 주민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고됐다.

대대적인 부역자 색출작전

유해발굴 현장에서 실탄도 발견됐다. 해골과 뼛속에 박힌 탄환도 눈에 띄었다.

유해발굴에 참여한 전문 인력들이 부서진 뼛조각을 수습하고 있다.

1950년 9월26일(음력 8월15일) 미군 기갑사단이 대전과 조치원을 차례로 수복했다. 이들이 천안을 통과해 서울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식이 아산지역에 퍼졌다. 아산지역 부역자 처벌은 1950년 9월26~27일 미군이 천안을 지나던 무렵부터 각 읍·면 치안을 맡았던 치안대에 의해 시작됐다. 그리고 9월29일 온양경찰이 복귀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민간인 희생의 가해자는 온양경찰과 경찰의 지시를 받은 의용경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등 치안대였다. 온양경찰은 사찰계에서 주도해 부역혐의자를 체포해 구금하고 조사와 처벌까지 감행했다.

각 지서에서는 본서에서 파견한 사찰경찰이 지서주임과 소속순경 등과 함께 부역자를 분류해 처벌했다. 부역혐의자 체포는 주민들의 증언이나 밀고로 이뤄졌고 조사과정에서는 구타, 전기고문 등이 따랐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부역과 무관하게 억울하게 휩쓸려 죽은 사람도 많았다. 희생규모도 경찰서장이나 해당 지서주임의 재량에 따라 달라졌다. 처형이 집행될 때는 경찰의 인솔로 치안대원들이 부역혐의자들을 처형지로 끌고 가 총살했다. 이러한 부역자 체포·살해는 1951년까지 계속됐다.

마을‧일가족 몰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

배방읍 중리에서 나온 유해 208구 중 성인남자로 확인된 유해는 19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성인여성 68명, 남여미상 16명, 어린이 58명, 기타 감식이 어려운 유해로 잠정 확인 됐다.

배방읍 중리에서 발굴한 유해.

공동조사단 조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기간 부역자 이외에도 이웃이 이웃을 밀고하고,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죽고 죽이는 억울한 죽음이 수없이 저질러졌다.

1950년 12월 초 배방면 북수리 4구 김석남은 온양경찰서에 수감됐다가 살해당했다. 김석남은 북수리 이장 곽세영이 공출을 착복한 사실에 대해 소를 제기해 갈등이 생겼다. 이후 전쟁이 나자 청년방위대 소대장인 곽세영의 사위 정모씨가 김석남과 그 가족을 ‘빨갱이’로 몰아 김석남을 비롯해 일가족 5명을 살해했다.

의용군으로 징집나간 이장 방씨 가족 5명, 의용군으로 징집된 부친을 둔 성낙구 가족 5명, 엄진섭과 그 처가 살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1951년 1월초 배방면 장재리에서는 양대운과 처 이만순, 딸 양춘자, 아들 양구창, 아들 양춘호, 딸 양영순, 임신 중이던 양대운의 동생 양대록의 처 윤순희, 그의 자녀인 유아 2명 등 일가족 10명이 모두 참변을 당했다.

1951년 1월5일 배방면 세교리 1구 전달석과 모친 유씨, 동생 전 유, 형 전윤옥, 형수 박씨, 조카 전해달·전해광, 형 전준옥, 형수 심씨, 조카 전해자·전해종, 미작명 영아 1명 등 가족 12명도 경찰의 지시로 배방면사무소 창고에 감금됐다가 모두 살해당했다. 전달석의 형 전윤옥과 전준옥의 인민위원회 활동혐의로 일가족을 몰살했다. 이때 전유, 전해천, 김병학 등 세교리 주민과 서울에서 피난왔던 이광수씨는 처형장소로 가던 중 도망쳐 생존했다.

이날 생존자 전씨는 “사람들이 ‘장날 소떼 엮듯이’ 새끼줄로 묶인 채 끌려가 배방면 성재산 방공호에서 총살당했다”고 말했다. 전씨일가 12명이 살해당하던 날 세교리 주민 30여 명도 연행돼 총살당했다. 이밖에도 치안대원들이 주민 60~70명을 연행해 감금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배방면 창고는 1·4후퇴시기 배방면민들을 감금했던 곳이다. 부역혐의자 가족들은 별도로 관리하고, 도민증 발급을 이유로 은밀히 야간에 연행했다. 감금기간은 보통 2~3일 정도였다. 1950년 12월 창고 보초를 섰던 임 모씨는 주민들이 밤에 연행돼 왔고 맞거나 발가벗겨지는 것을 목격했다. 임씨가 보초를 섰던 당시에는 40~50명의 주민들이 갇혀 있었으며 부녀자, 노인, 유아는 물론 갓난아기까지 포함돼 있었다.

임씨는 1951년 봄 성재산 아래 자신의 논으로 농사지으러 갔을 때 방공호에 시신이 가득한 것을 목격했다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설 묻어서 땅 밖으로 사체 일부와 옷가지 등이 나와 있었다. 그 주변에서 어린아이가 하루 이틀 울다가 죽었다” 임씨는 당시 시체 썩는 냄새가 지독해 일을 하지 못했고, 결국 땅을 팔아버렸다.

1951년 1월7~8일 배방면 향토방위대가 면내 10여 개 마을주민 남녀노소 300여 명을 곡물창고에 집합시킨 후 저녁에 새끼줄로 묶어 성재산으로 끌고 가 총살시켰다고 생존자 맹석재씨가 증언했다.

위 내용은 <충남경찰사>를 비롯한 공식문건과 생존 목격자들의 증언을 기록한 <온양향토사><유해발굴공동조사 자료집> 등에 기록돼 있다.

탕정면 용두리, 염치읍 대동리 유해발굴 계속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는 이달 말 작년에 이어 한국전쟁 아산시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을 탕정면과 염치읍에서 추진할 예정이다.

배방읍 중리 유해발굴에 앞서 망자를 위로하고 있다. 이달 말 발굴 예정인 탕정면과 염치읍에서는 160구 이상의 유해가 나올 것으로 추정된다.

아산시는 지난해 배방읍 중리에서 208구의 유해를 수습한데 이어, 올해는 탕정면 용두리와 염치읍 대동리 새지기 일원에서 유해발굴을 이어갈 예정이다.

9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탕정면 용두리와 70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염치 대동리 새지기 두 곳은 생존자 증언에 따라 일부 현장조사를 마친 상태다. 주민들은 당시 탕정지서와 면사무소 곡물창고 등으로 연행했다가 용두리와 대동리 야산에서 처형당했다.

아산시유족회 조사에 따르면 탕정면 희생자 유족은 70명이라고 밝혔다. 희생자에 비해 유족이 적은 이유는 노인부터 갓난아기까지 부역혐의자의 가족 전원을 무차별 학살했기 때문이다. 또 유족이 있더라도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워 고향을 떠나야 했다. 생존한 유족들은 그동안 시신수습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고, 먼발치에서 술 한 잔 올리는 것도 숨어서 해야 했다.

탕정면과 염치읍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다수의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살해 도구로 총칼뿐만 아니라 농기구와 죽창 등을 사용해 더욱 끔찍한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아산시는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사건 유해발굴사업을 위해 2018년 지방보조금 예산 1억1400만원을 의회로부터 승인받았다. 전국지방자치단체 중 유해발굴사업을 직접 지원한 사례는 아산시가 처음이다.

“생존자들, 잊혀 지기만을 강요 당해왔다”

홍남화 회장은 “지금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지나간 역사를 끄집어내서 어쩌자는 것이냐며 불편해 하는 분들도 많다”며 “그러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매래는 없다’고 했던 신채호 선생님의 말처럼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은 너무 오랜 세월동안 잊혀 지기만을 강요당해 왔다.”

이달 말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아산시 유해발굴 2차 사업이 탕정면과 염치읍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 홍남화 회장이 탕정면과 염치읍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을 앞두고 한 말이다.

아산지역 민간인학살은 800여 명으로 공식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크게 웃돌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발굴한 배방읍 중3리 세일탄광의 경우 공식 기록에 150여 명이 희생당했다고 알려졌으나, 최종 수습된 희생자 수는 208명 이었다.

이들 중 성인남자로 확인된 유해는 19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성인여성 68명, 남여미상 16명, 어린이 58명, 기타 감식이 어려운 유해로 잠정 확인 됐다. 확인된 희생자 상당수가 가임기 여성과 어린아이다. 발굴에 직접 참여한 전문 인력과 현장을 찾았던 봉사자 등은 60여 년전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홍남화 회장은 “갈수록 매장지 위치를 찾기가 어렵고, 도시개발과 도로건설 등 각종 개발사업으로 유해발굴이 불가능한 곳도 많다”며 “한국전쟁 당시를 목격한 생존자의 증언을 듣기도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어,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전수조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홍 회장은 이어 “지금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지나간 역사를 끄집어내서 어쩌자는 것이냐며 불편해 하는 분들도 많다”며 “그러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매래는 없다’고 했던 신채호 선생님의 말처럼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아산시민의 동행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는 일반 주부부터 회사원, 교사, 학생, 어르신까지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아산지역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제 파시즘 잔재 청산, 독립운동사 발굴,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한국전쟁 아산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정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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