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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남호탁의 '촌지 삼천원'

천안수필가

등록일 2021년08월01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아내도, 나도 김치를 좋아한다. 하여 우리 집 식탁 위에 김치가 놓이지 않는 날은 없다. 아내는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 하여 나는 아내가 담근 김치를 맛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떤가. 김치가 끊일 날이 없고 내 곁에 바싹 붙어앉아 나만큼이나 맛나게 김치를 먹어주는 아내가 있으면 그만이지. 그런 맛난 김치가 있어 고맙고 그런 살가운 아내가 있어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김치를 잘 담그는 아내와 사는 옆집 김 부장도, 김치를 담근 경험이 없는 아내와 사는 나도 꼬박꼬박 빠뜨리지 않고 김치반찬을 먹긴 마찬가지니, 세상살이가 그지없이 오묘하고 고맙기만 하다. 두루두루 나눠주는 세상 덕에 아내와 나는 행복하다.  

결혼 후 우리 부부는 부모님 댁 근처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레지던트 3년차, 아내는 나보다 다섯 살 아래. 집보다 병원에 있는 시간이 많고 늘 피곤에 절어 있으면서 잠이 부족한 남편.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탓에 미국에서 공부하다 내게 엮여 후다닥 서둘러 결혼을 하고 얼떨결에 주부가 되어버린 아내. 그런 우리 부부에게 어머니는 늘 김치를 날라다 주셨다.
우리 어머니 역시 여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맛있게 먹어주는 자식들 탓에 김치를 담그고 김장을 하는 분이셨다. 노인네 두 분만 드시자면 굳이 배추를 다듬고 김장을 할 이유가 무에 있겠는가. 노인네 두 분이 드시면 얼마나 드신다고. 슈퍼에만 가도 널린 게 김친데.
목천면 보건지소에서 공중보건의사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마을 할머니나 아주머니들로부터, 개원을 하고부터는 환자나 간호사 심지어 원무과 직원으로부터도 엄청나게 얻어먹었다. 맛있게 먹어주는 나를 보며 더 즐거워하고 고마워하는 것이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개원을 하느라 진 빚 외에도 환자나 환자의 가족에게 진 빚 또한 크다. 나란 사람의 삶은 살수록 빚만 늘어나는 것 같다.   

한 사람의 손끝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내가 맛보는 김치 맛은 매번 다르다. 김치통을 새로 헐 때마다 다른 맛이고, 이런 이유로 물릴 턱이 없다. 먹던 김치가 다 떨어져갈 때쯤 되면 은근히 다음번에 맛보게 될 새 김치통에 대한 기대로 설레기까지 한다. 식탁 위로 오르는 김치의 종류만도 장난이 아니다. 배추김치, 깍두기, 백김치, 열무김치, 갓김치, 나박김치, 동치미, 총각김치, 고들빼기김치…….
새삼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 혹여 아내가 김치 담그는 걸 배우기라도 했다면 내 어찌 이토록 다양한 김치를 구경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기막힌 맛은 뒤로하고라도. 가끔은 서울 부모님 댁에 갈 때 김치를 가져다 드리는 경우도 있다. 아내가 담근 김치라는 나의 말에 어머니는 흔쾌히 속아 넘어가 주신다.
김치만이 내가 얻어먹는 음식이라 여기면 오산이다. 꼬부랑 할머니가 손수 수확한 깻잎으로 짠 들기름, 시부모님이 담궜다며 원무과 직원이 내어놓는 고추장, 사슴농장 아저씨가 몸에 그만이라며 정성스레 건네주는 녹용, 성환배, 청양고추…… 이러니 36 내 허리사이즈는 줄 날이 없다. 이미 치료비를 다 지불했음에도 그걸로도 모자라 이것저것 챙겨주기 바쁜 것이니, 고마우면서도 셈이 느린 분들이다.

내게 이것저것 챙겨주는 환자나 환자의 가족치고 고맙지 않은 분이 없지만, 유독 고맙고 기억에 오래오래 남아있는 분이 있다. 음성병원에서 만났던 할머니다. 내가 인턴이던 시절 순천향대학병원은 서울 한남동 외에도 천안, 구미, 음성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인턴은 서울과 지방을 오고가며 근무를 서야만 했다. 음성병원 산부인과에서 인턴근무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유독 고통스럽게 산통을 겪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있는 욕 없는 욕을 남편에게 퍼부어대고 비명을 지르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몸을 뒤틀며 발버둥을 치는 통에 인턴인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환자의 팔을 붙들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산모의 옴 몸은 땀으로 범벅이었고, 목은 쉴 대로 쉬어 있었다.
풋내기 의사였던 나는 무섭기까지 했다. 이러다 사람 잡겠다 싶었다. 산모가 어찌나 비명을 질러대며 내 손등을 꼬집어대는지 그야말로 내 손등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이럴 바엔 내가 애를 낳고 마는 게 낫지 싶었다. 분만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가족들은 아마도 의사가 아내를, 며느리를 잡는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렇듯 힘겨운 시간이 지나고 예쁜 공주님이 태어났다. 출산과 동시에 잠시 혼절해 있던 산모가 깨어나더니만 허공을 향해 한마디 내뱉었다.
“아들인가요?”
“예쁜 공주님입니다.”
분만실에선 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딸이라는 말에 산모는 병원이 떠나가라 목 놓아 울었다. 분만실인지 장례식장인지…….
한참을 통곡하던 산모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는 내뱉은 한마디. “언제 다시 애를 낳을 수 있죠?” 자신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그렇듯 쉽게 던질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다시는 애를 낳지 않겠다고 하면 모를까, 부적절한 대사였다. 나는 그날 보고야 말았다. 여자가 얼마나 독한 존재인가를.

분만실을 나와 1시간쯤 지났을까, 나는 인턴숙소 근처의 복도에서 서성대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용케도 할머니는 나를 알아봤다. 하긴 그 난리를 쳤는데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반색을 하며 내게로 몇 발짝 다가선 할머니가 나를 향해 물었다.
“의사 선상님이 몇 분이나 계신데유?”
나는 의아해하며 얼떨결에 셋이라 대답했다. 산부인과 레지던트 1년차, 2년차, 그리고 인턴인 나.
“이걸로 식사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게로 다가온 할머니는 내 가운의 주머니 속으로 봉투를 찔러놓고는 총총 사라졌다. 촌지라는 거였다. 고생이야 했지만 그렇다고 의사 수까지 물어가며 촌지를 챙겨주시다니. 숙소로 돌아온 나는 슬그머니 가운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꺼내 보니 봉투마냥 정성스레 접은 신문지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펼친 신문지 안에는 누렇게 바래고 너덜너덜해진 지폐 몇 장이 들어있었다.  
‘삼천원!’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순간 코끝이 찡해왔다.

 

 


수필가 남호탁 작가는 2008년 ‘수필가 비평’으로 등단해 천안수필문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의사수필가협회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곡문학상, 흑구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똥꼬의사》《의학박사 남호탁의 똥꼬이야기》《수면내시경과 붕어빵》《가끔은 나도 망가지길 꿈꾼다》《아프지 않으면 죽는 겁니다》등이 있다.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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