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맨위로

박상분 수필가 '소나기 풍경'

등록일 2022년01월03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소나기가 쏟아졌다. 
불볕 같던 열기가 한순간에 쫓겨 달아났다. 앞 베란다를 달군 열기가 잦아들고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시원한 바람에 이끌려 나는 앞 베란다에 다가섰다. 무더운 여름 한낮의 소나기는 참으로 고맙다. 코앞에까지 후끈한 여름 한낮의 열기를 삭히는 소나기다. 

여름방학이라 아파트 속 어린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보통 때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목소리다. 그네, 시소, 뺑뺑이, 정글짐, 놀이기구가 어쩌다 부는 바람과 심심함을 달래더니 모처럼 활기를 찾았다. 햇볕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재잘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파트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생동감이 느껴졌다.

그 장면이 부러웠던지 소나기가 샘을 부렸다. 순식간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가싶더니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계집애들의 소프라노가 더 멀리, 더 긴박하게 들렸고, 머슴애들의 목소리는 허둥거리는 발자국 소리에 묻혔다. 아이들의 발자국소리가 집안으로 총총히 숨은 뒤에도 소나기는 한참동안 더 쏟아졌다. 

황순원은 소나기로 소년과 소녀를 만나게 했다. 
개울물에서 물장난 치고 있는 소녀의 앞으로 소년은 지나갈 수가 없어서 저만치서 빙빙 돌았다. 그렇게 수줍은 소년이었는데 소나기는 그들을 자연스레 가까워지게 했다. 넓은 들판에서 소나기를 만났으니 원두막은 참 좋은 피신처였다. 소나기가 그치자 애들을 집으로 돌아가야 할 생각으로 마음이 급했다. 불어난 개울물을 건너기 위해 소년은 소녀를 업어 건네주는 친절한 용기를 감행 했고 다시 쏟아지는 소나기에 밭 가운데 세워둔 수숫대 그늘로 피해야했다. 그 애들의 뜀박질에 절벅거리는 발자국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갑작스런 소나기는 많은 사건을 만들었다. 내가 어릴 때 소나기는 운동회 하는 날 호루라기를 부는 선생님이셨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가장 큰 관심은 개인 달리기에 있었다. 달리기를 하려고 출발선에 서 있을 때에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오면 온 힘을 다해 힘껏 달려야 했다. 결승 지점의 하얀 끈이 있는 곳까지 마구 달려야했다. 
 
꼭 그랬다. 
운동회 날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기라도 한 것처럼 소나기가 후드득 떨어지면 사람들은 마구 달렸다. 아버지는 개울 건너 풀밭에 매어놓은 암소, 누렁이에게 달려 가야했다. 엄마는 재빠르게 뒤란으로 뛰어가 열어놓았던 장독 뚜껑을 덮어야했고, 빨랫줄의 빨래를 걷어 오셨다. 나는 마당의 멍석에 널어놓은 첫물 고추를 걷으러 뛰어야했다. 오빠는 바깥마당가 잔디밭에 매어 둔 염소에게 달려 가야했다. 자연 속에 살았던 어린 날의 동화 같은 추억이 잠시 내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했다. 이제 나는 소나 염소를 키우지도 않고, 장독대도 없고, 빨래도 앞 배란다의 천정에 매달려 있다. 그러니 소나기가 내려도 서둘러 달릴 필요가 없다. 소나기에도 끄떡없이 베란다 빨랫줄에 매달린 옷을 공연히 쳐다보았다. 


아래를 보니 폭우에도 할머니가 105동을 향하여 유유히 가고 계셨다. 곁에서 보고 있던 딸은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쩌긴 뭘 어째? 집에 가서 샤워하면 되지, 저 할머니 시원하시겄다.”
엄마의 시큰둥한 말에 딸은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한여름이니 시원한 건 사실이지만 그 할머니의 힘겨운 거동이 나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할머니는 중풍에 걸리신 모양이었다. 내가 퇴근 할 무렵에 할머니도 노인정에서 퇴근하시는지 가끔 마주치곤 했었다. 할머니는 다리가 네 개인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시고 한 걸음 한 걸음 안타깝게 움직이셨다. 
 ‘오늘도 할머니는 노인정에 가셨을 거다. 구름이 시커멓게 몰려오고 곧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아 소나기가 쏟아지기 전에 서둘러 집에 가야겠다고 노인정에서 나오셨을 거다. 105동이 저기 보이는데, 걸음은 더디기만 했고 먹구름은 몰려오고, 결국 소나기를 피할 수가 없었을 거다.’

소나기는 쏟아지는데, 무거운 보행보조기도 할머니의 몸도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 샤워기 꼭지를 세게 틀어 놓은 것처럼 소나기 줄기가 할머니의 온몸에 뿌려지고 있었다. 그 때 105동 건물 속에서 젊은 댁이 큰 우산을 들고 잰 걸음으로 나와 그 할머니께로 갔다. 우산은 할머니와 젊은 부인의 든든한 지붕이 되었다. 지팡이의 네 다리가 한 걸음 가고, 할머니가 한 걸음 따라가고, 젊은이와 우산이 또 한 걸음 따라가고, 할머니와 젊은이와 지팡이, 소나기와 우산이 연출하는 사랑의 퍼포먼스였다. 

소나기 속 아름다운 풍경이 내 입가에 또 미소를 머금게 했다. 조금 전에 시원하시겠다고, 샤워하면 된다고, 가볍게 말한 뒤통수가 슬그머니 부끄러웠다. 104동 10층에서 마냥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은 저렇게라도 걸으실 수 있는 저 어머니가 부러워서, 너무 다행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튕겨 나온 시샘이었나보다. 내 어머님은 병이 나신 뒤에는 한 번도 신발을 신어보시지도 못했다.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라이프 우리동네 향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