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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양, 개와 사람… 관계에 대하여

맹자의 곡속장에 있는 ‘이양역지(以羊易之)- 양과 소를 바꾼 이야기’

등록일 2022년04월15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맹자가 인자하기로 소문난 제나라 선황을 찾아가 자기가 들은 소문을 확인합니다. 
소문은 이런 것입니다. 

선왕이 소를 끌고 지나가는 신하에게 묻습니다. “그 소를 어디로 끌고가느냐?” “흔종하러 갑니다.” 흔종이란 종을 새로 주조하면 소를 죽여서 목에서 나오는 피를 종에 바르는 의식입니다. 소는 제물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 소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렸던가 봅니다. 
임금이 “그 소를 놓아주어라”고 합니다. 신하가 “그렇다면 흔종을 폐지할까요?” “흔종이야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양으로 바꾸어서 제를 지내라”고 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맹자가 당시 왜 바꾸라고 했는지 묻습니다. 선왕은 “벌벌 떨면서 죄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소가 불쌍해서 바꾸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럼 양은 불쌍하지 않습니까? 양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맹자는 선왕 자신도 모르고 있는 이유를 이야기해줍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이유는 양은 보지 못했고 소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본 것’과 ‘못본 것’은 엄청난 차이가 생깁니다. 본다는 것은 만남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아는, 이를테면 ‘관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엄청난 차이를 말함입니다. 
옛 선비들이 푸줏간을 멀리한 까닭은 그 비명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맹자의 곡속장에 있는 ‘이양역지(以羊易之)- 양과 소를 바꾼 이야기’


가축에서 신분상승한 개

요즘 반려견의 이야기도 ‘이양역지’의 관계성에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개는 보았고, 소는 못보았습니다. 개는 보았고 돼지는 못 본 것이 되고, 개는 보았고 닭은 못보았지요. 

예전에야 개를 키우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도심에서야 키울 수도 없었고, 시골에서는 그저 다른 가축처럼 키웠지요. 물론 소나 돼지, 닭 보다는 사람과 친근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 관계성에서 본다면 다른 가축보다 사람과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죠.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면서 가족의 개념도 바뀌었습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화 된 것이죠. 사람들이 점점 외로워지자 그들은 작은 개 위주로 집안으로 들입니다. 바로 준가족화한 것이죠. ‘반려견’이라 해서 짝으로 삼았습니다. 
반면 소·돼지·닭을 키우던 농가들이 자녀를 모두 도심으로 보내고선 피폐해진 농촌을 지킵니다. 더 이상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요. 시민 삶이 높아지면서 고기소비도 높아지는 터에 소·돼지·닭은 ‘농장’이라는 곳에서 집단으로 사육됩니다. 
이제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은 개가 소·돼지·닭과는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개는 가족이고, 소·돼지·닭은 먹거리로 구분합니다. 도둑을 지키는 개와 들일을 하는 소는 사람에게 더욱 특별한 가축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만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습니다. 

“개도 가족이니 더 이상 사람의 먹잇감으로 보지 마십시오. 개도 사람과 같습니다. 법으로 먹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 그 외 가축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개의 눈을 보고, 개를 만난 것입니다. 선왕의 소와 같습니다. “개를 죽이지 마시오.” “그렇다면 모든 가축을 먹잇감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인지요?” “그럴수야 없겠지요. 개를 살리는 만큼 소·돼지·닭을 더 먹으십시오.” 
돼지와 닭은 차치하고 소는 불쌍하지 않습니까. 소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도와 들일도 같이 했던 소입니다.

이제는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개는 만났고 소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개는 사람과 더욱 가까워졌고, 들일도 없어진 소는 더욱 멀어졌습니다. 돼지와 닭은 두말 할 나위가 없지요. 

개를 더 이상 먹지 말라는 주장이 일리가 있습니다. ‘관계’가 바뀌면 개와 소의 처지가 바뀔 수도 있겠지요. 돼지나 닭에게도 기회가 있겠지요. 어느 나라는 소를 신성시하고, 어느 나라는 돼지를 그리 합니다. 모든 동물을 만난 사람들은 어느덧 ‘채식주의자’가 됐습니다. 

앞으로도 기대가 됩니다. 우리가 만날 것과 만나지 않을 것에 대하여. 무엇보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하여.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용되는 일입니다. 


이양역지를 통해 우리 시대의 인간관계와 사회성의 실상을 봅니다. 
어떤 이가 지하철에서 겪은 일입니다. 그는 곧 내릴 사람을 골라서 바로 앞에 섰습니다. 전철이 서자 그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 얼른 빈 자리로 옮기고는, 자기의 본래자리를 나처럼 앞에 서있던 친구에게 권합니다. ‘이양역지’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자리에 대한 연고권이 내게 있는 것인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겁니다. 
이와 같은, 경우 없는 일이 일어난 건 ‘만남의 부재’ 때문입니다. 그 여자와 나는 만난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습니다. 지하철 속의 만남은 20분만 지나면 끝나는 만남입니다. 만약 그 전철 안에서 3년쯤 먹고 자고 같이 생활한다면 그 사람이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맹자가 강조한 의(義)가 수오지심(羞惡之心-부끄러움)입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관계가, 만남이 지속적일 때 생깁니다. 20분간의 만남은 부끄러움이 형성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얼마든지 남의 좌석을 ‘불법’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담론>에서 -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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