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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2·9의거 정신을 계승하자’… 기념행사 개최

천안동남소방서 남성의용소방대 주관… 태조산 보훈공원 내 기념탑 앞에서 77주년 행사개최

등록일 2023년02월1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천안동남의용소방대 연합회(회장 이권재)는 9일 태조산 보훈공원 내 2·9의거 기념탑 앞에서 제77주년 ‘천안 2·9의거’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천안2·9의거는 1946년 2월9일 천안의용소방대원이 봉기해 천안점거를 기도한 좌익세력을 소탕한 사건이다.

이날 행사에는 신동헌 천안시 부시장과 천안시의회 의원, 각 지역 남·여의용소방대장, 유가족 등 수백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에서 고 장길환씨 손자인 장동욱씨는 유가족을 대표해 매년 잊지 않고 천안2·9의거 호국정신과 향토사랑을 계승하는 기념식을 개최하는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권재 동남남성의용소방대장은 “천안2·9의거에 참여한 의용소방대원들의 나라사랑과 희생 정신을 계승해 앞으로도 천안시민 안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신동헌 천안시부시장도 “선대들의 애국·애향 정신을 다시한번 가슴에 되새겨 재난 등으로부터 천안시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성렬 전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이 말하는 2·9의거
 

천안 우리고장 어른들은 1946년 2월9일에 반공의거를 일으켰다. 1946년 새해를 맞아 혼미한 정세는 신탁통치 찬·반의 갈림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전략대로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2월8일 오후 3시경 천안 목천 흑성산에서 발생한 원인모를 산불로 천안의용소방대원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산불진화작업이 끝난 후 모든 대원은 큰재빼기에 있는 서울식당에 모여 심상치 않은 국내정세와 천안의 긴급상황을 절박하게 논의했다.

당시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자들은 천안 지하조직 공산주의자 공작원들과 조직을 강화했고 우익인사들을 테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에 천안의용소방대가 미리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을 분쇄하고 조직을 소탕해야 한다고 절규했다. 참석한 대원들은 긴박한 상황을 절감하고 결연히 의거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8일 저녁에 결행하기로 의견을 일치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조직 공작활동의 은신장소인 흥아산업, 수도주물공장, K.T.C(한국트럭회사)의 노동자들 속에 숨어있었다. 천안의용소방대는 3개편대로 행동조직을 편성했고 광복청년단원들이 거사에 합세해 동조했다.

8일 날 밤 먼저 신탁통치 찬성주모자인 당시 인민위원회 노동책이며, 자유신문 지국장이었던 최종순의 집을 급습하고 체포해 경찰에 인계했다. 가택수색하는 중 우익인사 테러 살해대상 명단도 입수하게 됐다. 살해하려 했던 인사 중에는 당시 천안경찰서장이었던 정석우 선생, 천안군수였던 유광준 선생, 천안의용소방대장이었던 김광수 선생, 반탁위원장 윤길순 선생, 조흥은행지점장 이병흠 선생, 남창당인쇄소 남응원 선생 등 지방유지 지도급 인사 30여명의 이름이 있었다. 

2월9일 의용소방대원들과 광복청년단원들은 최종순의 집에서 입수한 증거내용을 확인하고 행동에 들어갔다. 수도주물공장, 흥아산업, K.T.C를 일제히 급습한 대원들은 공장노동자들 속에 숨어있는 공산당원들을 색출, 소탕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도주하여 뿔뿔이 흩어져 좌익세력이 무너지고 유혈충돌의 절박한 위기는 차츰 가라앉게 되었다. 9일날 오후 주동자 김두환이 전 문화원 옆 천왕사(당시 대흥사)에 처 김동일과 같이 은신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급습했으나 급습소식을 미리 간파한 그들은 이미 도주했고, 광속과 다락에서 다량의 무기와 흉기를 찾아냈다.

11일 천안의용소방대원들과 광복청년단원들은 성환에 진출해 성환의용소방대 반공투사 조귀실, 송범용, 장갑준, 이종석 동지들과 합세해 성환에서 공작활동하는 공산주의자 이종걸·정선용·정근용을 체포해 천안경찰서에 인계했다.

이렇게 하여 천안에서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인사를 테러·살해하려는 폭동계획은 사전에 평화적으로 진압됐다. 

2월24일 대동신문과 전국노동자신문은 최초로 좌익 소탕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졌다고 대서특필해 보도했으며 이 의거를 일컬어 「천안2·9 반공의거」라 했다. 2·9의거는 주위에 알려졌고, 우익인사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미군정포고령 제1호 ‘난동 및 파괴행위 금지위반’이라는 죄명으로 2·9의거 주동자였던 윤길순, 김광수, 이한종, 김민웅, 유필남, 이창중, 이달종, 성낙수, 배순복, 이환국, 방성근, 조귀금, 이원봉, 신기용, 이강연 선생 등 15명은 체포돼 대전형무소에 끌려가 억울하게 조사·문초를 당하고 재판까지 받게 돼 집행유예 3년부터 벌금형까지 실형을 선고받게 됐다. 어처구니없는 미군정 혼란정세 속에서 이 사건의 판결은 대법원까지 이어졌는데 결국 우익측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7월8일 우리고장 천안이 인민공화국(북한) 수중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1946년 2·9의거 당시 극적으로 피신해 월북했던 오세환, 임두빈 등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은 인민군과 같이 천안에 다시 돌아오게 됐다. 그들은 2·9의거 인사와 가족들에게 악랄한 만행을 일삼아 공포와 초조감에 떨게 했으며 2·9의거 관계인사 전원은 살을 찢는 고문을 당했고 잔인하게 살해된 애국인사들은 윤길순, 최력산, 이갑복, 정영보, 이규경, 홍병렬, 송하영 선생 등 일곱어른들이었다.

무혈평화로 감행됐던 2·9반공의거는 마침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혈, 잔악무도한 살인만행으로 끝을 맺었지만 2·9의거는 인간의 권리와 행복을 지키려는 향토정신이었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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