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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호씨 “바리깡 하나면 세상도 무섭지 않아요” 

어려운 시절, 이발사로 살아온 인생이야기 

등록일 2021년07월3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천안사람 이발사 문동호(76·동양이용원). 오늘 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동녘에 해가 떠오르기도 전, 댓바람에 휘적휘적 걸어와 가게문을 연다. 35년을 한결같이 출퇴근한 가게인데, 요즘은 때로 연인처럼 몹시 보고싶어질 때가 있다. 손님이 있어서가 아니다. 고작 하루에 한두명, 잘해야 서녀명의 손님이 들락거리는 일터다. 
제일 먼저 노오란 주전자에 반쯤 물을 담아 데운다. 어제저녁 청소를 하고 퇴근해 깨끗하지마는 습관처럼 빗자루를 든다. 쓱싹쓱싹…, 빗자루질도 이골이 났나 보다. 웬만한 리듬보다 더 감칠맛 나고 정겹다. 가게문을 열고 도로변도 쑤욱 훑어본 뒤 또다시 쓱쓱싹싹~. 
가게로 들어오니 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컵에 대충 물을 따르고 스틱커피를 탄다. 무슨 보약이라고, 공복에 커피를 타고 있을까. 스스로 의문을 던지면서도 손님 대기의자에 철푸덕 앉아 홀짝홀짝 커피를 들이켠다. 가게 안이 조금씩 환해지고 있다. 아침해가 문틈으로, 유리창으로 스멀스멀 들어오고 있다. 
 


평생을 이발사로 살아온 그에게 ‘삶’이란 무엇일까?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입니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그리 대답할 것이다. 담백하게 말하지 않고서는, 3박4일 앉혀놓고 대답해도 끝나지 않을 이야기임을 안다. 어차피 다 말하지 못할 바에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지나가듯 ‘툭’ 말할 것이다. 
삶은 두 가지로 흐른다. 살아지는 것과 살아내는 것이다. 다행히 문 이발사는 이발기술을 악착같이 배워 ‘살아내는’ 쪽을 택했다. 다시 생각해도 멋지게 잘 해낸 것 같다. 마지못해 세월에, 환경에 끌려다니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건 생리에 맞지 않는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살아온’ 세월이다. 
이제 이발로 살아온 50년이 지나간다. 그리움이란 불현듯 찾아오는 것인가. 언제라도 이발기계를 놓겠다고 생각하니 억척같이 살아온 생의 감회가 새롭다. 
60년대, 그리고 70년대 ‘이발소’는 80년대 이후 풍경과는 또 다르다. 한때 방송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뜨거운 관심을 받은 바 있다. 복고풍을 다루다 보니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옛 향수에 푹 빠져들게 했던 드라마다. 
이후 응답하라는 1994, 1997 시리즈로 이어졌지만, 좀 더 과거로 가버렸다면 어땠을까. 지금은 기억속의 풍경이 되어버린 그 시절. 가닥가닥 끊어진 기억필름을 꿰어맞추며 ‘그땐 그랬지’ 하며 무릎이라도 탁 하고 칠 일이다.  
 


세월이 지나간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해방둥이(1945년)’로 태어났다. 잔뜩 귀여움받을 나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포탄소리와 총성.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세상은 폐허 속에 민낯을 드러냈다. 숨은 쉬고 있었으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아간다는 자체가 공포였다. ‘블랙아웃’된 시대. 심장은 항상 멎어있듯 했다. 

무얼 하며 살아갈까 고민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할 게 많지도 않았다. 겨우 중학교를 마치고 주저없이 ‘이발사’를 택했다. 배우는 길은 몹시도 험난했다.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은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또한 배우는 입장에서도 대단한 것이었다. 
“혹독하게 맞으면서 배워야 했어. 지금사람들이야 알 리가 있나. 그 자리에서 죽으면 죽었지 도망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지. 그건 삶에서 도망치는 일이 되는 거거든. 그럼 모든 것이 끝장이야. 아, 그거 아나? 우리 일은 일제의 잔재가 많은 직업이라는 거. 공사장 일이나 목공일처럼 말야. 그래서 우린 다들 술이 세어. 그 시대는 그랬어.” 

그때는 몇 개의 동네가 이용하는 이발소가 하나씩 있었다. 이발소 하면 기억나는 몇가지 인상을 떠올리게 한다. 
먼저 흰 가운을 입은 이발사다. 의사와 구분이 안되었다. 손에 든 바리깡이나 이발가위로 구분될 뿐이다. 과도같이 생긴 면도칼은 보기만 해도 으스스하다. 면도하기 전 항상 혁대같이 생긴 것에다 쓱쓱 문지르며 날을 갈았다. 이발사로 변장한 킬러가 면도칼을 잡고 있는 영화장면을 본 뒤로는 섬뜩한 상상을 하곤 했다. 면도칼을 떠올리면 함께 기억되는 것이 면도 거품솔이다. 솔은 비누거품도 많고 뜨겁게 데워져 감은 눈 위로 전체에 발라져 버린다. 
이밖에도 머리감기는 모습이나, 어린아이일 경우 의자높이를 맞추는 장면 등이 떠오른다.  
 


운이 좋아 20대 중반쯤, 온양나들이에서 이발소를 차렸다. 15년쯤 하다가 지금의 천안 큰시장길 파고다아파트 옆에 ‘동양이용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35년째 운영중이다. 
2011년 4월. 추위가 다 가시기 전의 어느 봄날. 이발의자 3개가 놓여있는 아주 작은 공간의 풍경이 떠오른다. 

한 의자에 머리를 맡긴 손님과 이용사가 있다. 보통 손님 한명당 40분이 소요된다. 만원짜리 한 장이면 손님 두상에 안성맞춤인 머리깎기에 면도, 머리감기기, 드라이까지 풀세트가 가능하다. 
흰 가운을 입은 이발사는 수술대에 선 의사마냥 신중하다. 치직찌직… 너를 사랑하고도 늘 외로운 나는…. 치직거리면서도 끊기지 않고 흘러나오는 라디오 속 노래는 80년 말쯤의 인기있던 가수 전유나의 ‘너를 사랑하고도’였다.
그는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손님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금방 40여분의 시간이 지나고 머리는 말짱해졌다. 낯선 이에게도 금방 편한 이야기상대가 되는 그. 
어디 처음부터 그랬을까. 멋쩍기도 하고 숫기도 없어 한참을 애먹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생존’의 어려움이 따르는 법. 어느날 무섭게 덤벼들었다. 어색해도 말도 걸고 응대도 해주면서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배워나갔다. 
사람 사는 곳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관계지향’.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면 다음에는 먼저 다가와 인사나누는 것이 인지상정임을 시나브로 몸으로 체득했다.  

돌이켜보면 아내는 가정주부로 안살림을 훌륭히 해내었다. 하나 둘 단골이 생기면서 이용원은 그런대로 살아갈 형편이 되었다. 세 자녀 모두 대학을 졸업시킨 것도 이발사로서 대단한 긍지를 갖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이 장학사로, 기업체 차장으로, 또한 기획사 대표로 나름 자리를 잡고 살아가니 더 바랄 게 있겠는가. 
아내가 불쑥 가게로 들어온다. 그리고 매양 하는 일인 양 수건을 착착 접어 개어놓는다. 
사이좋은 아내랑은 살면서 제주도도 한번 못가봤다. 아내와는 같이 살면서 가까운 광덕산도 한번인가밖에는 같이 가보지 못했단다. 이유가 거창하다. “저이는 걸음이 엄청 빠르고, 난 느리니깐….” 아내는 바쁜 남편인 줄 알기에 섭섭하다는 말보다 예쁘게 둘러대나보다.  
 

▲ 본지에서 2011년 인터뷰했던 신문기사를 아직도 스크랩해놓고 있다.


가게 한 켠에 죽 늘어선 감사패는 그의 봉사경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2008년 그가 이용사회 천안시지부장을 맡을 때만 해도 200명 정도의 회원이 있었는데, 3년 임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40명이 사라졌다. 하루에 서너명의 손님을 받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어느덧 직업에서 소일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이발사도, 손님도 50대 이하를 찾기 어렵다. 
시대는 바뀌어도 이발사는 그대로다. 성장이 멈춘 이발사, 그 자리는 미용사가 채우고 있다. 
“이용원은 스스로 도태되어 갈지 알고 있었을 거야.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시도해야 미래가 있는 건데, 10년 전이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일만 해왔으니….” 
행정안전부에서는 5년 내 이용원의 50%가 줄어들 것이라고 할 땐 안타까운 표정이 스친다.
그래도 이용원이 살가운 것은 손님을 ‘고객’으로만 보지 않고, ‘가족’으로 대한다는 데에 있다. 손님집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녀들은 무얼 하고,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는지, 경제형편은 어떤지 등 심지어 ‘그 집 밥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알 정도다.
그는 지부활동을 그만두면 힘 닿는대로 봉사활동에 전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2021년, 회원은 110명이 남아있고 봉사는 서너군데를 다니느라 분주하다. 10년 전 예측이 거의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 인터뷰 끝나고 배웅해주는 문동호 선생의 모습을 보며 10년 후에도 버젓이 '동양이용원' 간판이 붙어있을까 생각해본다.


이제 하루 두세명의 고객을 맞이하기도 힘들다. 그 뿐만 아니라 주변 이용원들의 형편이 대개 그렇다. 다행이라면, 그들 대부분이 나이가 들어 큰 욕심이 없다는 거다. 또한 구도심에 몰려있어 가게 임대료도 저렴하다. 버틸 수 있는 근거다. 
“이제는 그냥 문 열고 하루를 보내는 게 낙이에요. 하루에 한두번 손님이 찾아오면 정성을 다해 이발을 해드립니다. 오히려 무료함을 달래주니 고마울 따름이죠.” 
한때 여섯명까지 직원을 둬보기도 했고, 여성면도사들이 퇴폐의심을 받으면서 이용사회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면서 이용사로 일생을 산 문씨. 될 수 있다면 더 오랫동안 이용사로 사는 것이 그의 작은 바람이기도 하다. 
10년 후에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 “이제는 손님이 없어 문닫을 것을 걱정하기보다 건강이 나빠져 문닫는 걸 걱정하게 되었어요. 건강만 허락한다면 이곳 동양이용원은 그대로 있을 겁니다.” 

부부가 은혼식과 금혼식을 거쳐 75년을 해로하면 ‘금강혼식’을 기념한다. 혹 이발사로 75년을 보낸다면 얼마나 명예로울까. 그때 그의 나이 100세는 될 거다. 과연 가능할까.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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