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이 다가오니 작년 현충일쯤 보았던 방송이 생각난다.
사진사의 앵글은 부지런히 현장을 담고 있었다. 지리산이었다. 나무를 헤치며 이곳저곳을 파고 메우기를 수없이 반복하던 병사들이 눈썹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유해 분석전문 교수, 의사, 기자와 카메라맨 등 30여 명이 초조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후 병사들은 무엇이 보인다면서 갑자기 삽질하는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 순간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도 숨죽여 TV 화면이 뚫어져라 응시했다. 삭을 대로 삭아버린 뼈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뒤이어 이목구비 구멍만 뻥 뚫린 두개골들이 땅을 파는 대로 나왔다. 하얀 치아는 흙 위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느 것은 금테를 두른 것도 있었다. 계속 뼈가 나오고, 녹슨 군번도 나왔다.
공비 토벌대원들일 것이라는 추측도 했다. 당시 취하고 있었던 자세로 뼈를 세밀하게 맞추어 나갔다. 엎어지고, 구부리고, 다리를 꼬고, 벌렁 누운 형상들이었다. 총을 맞는 순간 쓰러지며 몸부림쳤을 당시의 고통스러운 몸짓을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날 것만 같았다. 작업을 하던 한 병사는 파 놓은 자리에 누워서 죽은 병사의 자세를 그대로 재연하였다.
이어 곳곳에서 총탄이 나오고 북한군 총알도 나왔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적군의 총을 맞았다는 증거라고도 했다. 빗발처럼 날아드는 총알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싸우다가 조국과 어머니를 부르며 죽어갔을 광경이 그대로 떠올랐다. 다리뼈 주변에서 가느다란 쇠줄도 나왔다. 지혈용인 것 같다고 했다. 넓적다리에서 솟구쳐 오르는 피를 막아보려고 쇠줄로 묶어가며 싸웠을 것이라 했다.
그저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엔 낡은 철모가 나오고 전투화가 나왔다. 전투화 속에서는 다섯 개의 발가락뼈가 오롯이 쏟아져 나왔다. 무어라 알 수 없는 울분이 북받치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병사들은 유해들을 부드러운 붓끝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 한지에 싸고 또 싸서 차곡차곡 상자에 담았다.
‘사람이 흙이 되어가는구나. 인간이...!’하며 내 팔다리와 얼굴을 만져보았다. 보드랍고 따뜻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넉넉한 삶 속에 젊은 병사들의 살과 뼈와 목숨이 녹아 있다. 나는 후세에게 어떤 자양분이 되어줄 것인가를 잠시 생각했다.
머리뼈 속마다 뼈만큼이나 단단한 흙이 있어 이를 제거하는 작업도 그리 쉽진 않은 듯했다. 다 삭아버린 바가지와도 같은 머리뼈가 자칫 바스러질 수도 있어서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작업이 이루어졌다. 마치 오래도록 분갈이하지 않은 화분처럼 뼛속에 꼭꼭 박힌 나무의 잔뿌리들은 흙과 하나 되어 쉽게 빼낼 수 없었다. 하긴 육십여 년 서리서리 맺혀 온 서러움과 한이 그리 쉽게 풀어질 수 있으랴.
어느 유해는 학창 시절의 희미한 사진 한 장을 갖고 있었다. 유해 분석 전문의사와 학자들에 의해 간신히 신원이 확인되었으나 끝내 가족은 찾을 수 없었다. 옛 전우였다는 70대 후반의 노인 한 분을 어렵게 찾았다. 그 노인도 외로운 병상에서 치유되지 않는 깊은 한을 체념과 한숨으로 삭이고 있었다. 까마득히 잊은 옛 전우의 소식을 들은 노인은 깡마른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또 훔쳐낼 뿐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가까스로 “바로 옆에서 같이 싸우던 친구였는데….”라며 멀리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60년 만에야 어렵사리 누님의 품에 안긴 이도 있었다. 누님의 통곡소리는 애간장을 녹였다. 그러나 그는 누님의 비통한 가슴에 안겨 눈부셔하지도 찡그리지도 않았다. 눈물 같은 건 더더욱 흘리지 않았다. 감정을 표현하기엔 이미 너무 긴 시간 속에서 모든 슬픔과 한의 옹이가 침묵하는 한 조각 나무껍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겨우 1m도 안 되는 땅속에 묻혀있던 유해들을 왜 이제야 발굴하는가 하는 아쉬움보다도 썩은 나무껍질 같은 유골 조각으로 60년 전의 핏줄을 찾아낸다는 것에 더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이따금 산 까치들이 내는 “까악~ 까악”소리가 슬픈 영혼들의 한 서린 울음소리로 들렸다. 스르륵 스르륵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는 소리가 초여름인데도 스산하기만 했다.
결혼 10여 일 만에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젊은 아내는 80대의 할머니가 되었다. 발굴단이 백방으로 애써보았으나 유골은 찾을 수 없었다. 삭정이 같은 손가락으로 백발을 쓸어 올리며 두 눈을 꼭 감은 채 비틀거렸다. 남편의 사진도 한 장 없이, 또 자식도 없이 혼자서 60년을 오직 남편만을 기다려 왔다는 할머니는 허탈해했다. 남편의 유해를 알아낼 수 있는 어떠한 증표도 제시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보는 이들조차 가슴 아파했다. 휘청거리는 몸으로 발길을 돌리다가 자꾸 뒤를 돌아보는 할머니의 모습이 TV 화면을 채웠다.
아나운서는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유난히 많은 전쟁을 겪어왔다고는 하지만, 천년의 세월이 흐른다 해도 지워지지 않을 우리 민족만의 쓰라린 상흔을 찾아내는 일에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이 작업을 중단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충일 특별기획 프로그램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다시 현충일이 다가온다. 우리나라와 우리 국기가 있다는 것을 가끔 잊고 살 듯, 조국을 지키다 죽은 이들을 자주 잊는다. 조기라도 잊지 않고 달아야겠다. 이번 현충일엔 아파트 집마다 조기가 달려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듯 바람에 펄럭였으면 좋겠다.
▲ 박상돈 천안시장이 천안시바르게살기협의회와 함께 태극기를 나눠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