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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직전의 침묵이라도 위대한 고독이라면

김다원(천안·수필가)

등록일 2024년03월19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적막강산’이란다. 새해 인사하러 오라버니댁을 찾았다. 95세의 연세에도 양로원이 아닌 자기 집에서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냐는 말에 대한 대답이다.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살지만, 자식들도 자기 자식들 건사가 바쁘고 몸이 아파 자주 오지 않는다며 외롭기는 마찬가지란다. 그러면서 늙으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당연한 듯 입으로는 말하지만, 주름진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 눈동자에 ‘적막(寂寞)’이란 단어가 보인다.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에 ‘적막’이란 말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죽어가는 적들을 보며 쓴 대목이다. 

‘적어도, 널빤지에 매달려서 덤벼들다가 내 부하들의 창검과 화살을 받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의 살아있는 몸의 고통과 무서움은 각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몫들은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무서움이었다 하더라도, 서로 소통될 수 없는 저마다의 몫이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끝은 적막했고, 적막한 끝들이 끝나서 쓰레기로 바다를 덮었다.’ 
 
누구라고 다를까. 100세 시대를 운운하는 세상의 물결에 나도 휩싸여 가고 있다. 굵은 둥치의 은행나무에 셀 수 없이 많은 잎이 달렸다가 찬바람이 오면 잎들은 각각 노란색의 물을 얻는다. 햇살을 더 받은 쪽과 덜 받은 쪽에 따라 물드는 시기는 다르다지만, 물이 다 든 후 잎은 각각 저마다의 풍경을 만들며 떨어진다. 초원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의 마지막도 적막이다. 더 이상 사냥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자기가 죽을 곳에 가서 마지막을 맞는다. 우리도 각각의 이유로 가족이 하나둘 떠나면 적막한 집에서 혼자 적막을 견디다가 간다. 

몽골의 풍속을 소개한 TV 속 장면도 생각난다. 너른 초원에서 동물을 기르다가 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그들이다. 그들과 더 이상 이동할 수 없는 늙은 아버지는 전통을 따른다. 얼기설기 엮은 움막에 음식과 물을 넣어둔 후, 자식들은 깊은 인사로 이별을 고한다. 움막에 남은 아버지도 그렇게 자기 아버지를 두고 떠났다. 초원을 휩쓰는 바람의 소리를 동무로 하고 손이 닿는 곳의 풀을 쓰다듬다가 그도 못 할 경우엔 조용히 몸을 내려 눕는다. 늦가을 땅에 내린 마른 잎처럼, 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바닥에 몸을 내리고 끝내는 흙이 된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부모는 떠나 사는 자식이 보고 싶다. 그런 마음을 아는 자식도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를 자주 찾을 수 없다. 가족이 함께 살아도 각자의 방은 섬이다. 자식도 부모도 각각 사는 것이 편하단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듯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곳엔 웃음도 적다. 소통하려고 애쓰다가 막히면 말을 거둔다. 적막이 흐르는 것이다. 귀먹고 눈멀어 침대에 각자 누워있는 양로원의 노인처럼. 오라버니댁의 외로운 눈동자에 『칼의 노래』의 한 대목이 겹친다.  
 


아!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 적막이 내가 원하는 고독의 적막이었으면 좋겠다. 행복한 고독,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하는 ‘내면의 위대한 고독’이다. 사물과 나누는 고독이다. 차가운 여인 같은 초승달은 천천히 마음을 넓혀 세상을 아우르는 보름달이 되고,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잎을 키워 성하(盛夏)의 깊은 그늘을 만든다. 그 숲은 수많은 생물들이 사건을 만들며 산다. 

우리는 그 사건들에 동참할 수 있다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고독하라’ 제안했다. 발생하는 일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새로운 시작이며, 시작이란 그 자체만으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까닭에 시작이 바로 신의 시작일 수도 있단다. 그런 마음으로 맞는 고독의 적막이라면 혼자라도 행복할 것 같다. 세상에 흔들리지 말고 행복한 방법을 자연의 고독에서 그 적막에서 찾으란다. 그렇게 가고 싶다. 릴케가 말하는 ‘위대한 고독’ 속으로. 
 

김다원 리포터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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