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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투른 숙수가 피나무 안반만 나무란다  

임낙호(천안·수필가)

등록일 2023년06월21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무슨 일이든 잘하는 사람은 어떤 조건에서도 제 할 바를 제대로 해낸다는 속담이 ‘명필이 붓을 탓하지 않는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자기 탓은 하지 않고 도구나 환경만 탓하는 경우엔 뭐라고 할까요. 네, ‘서투른 숙수가 피나무 안반만 나무란다.’입니다. 
 

숙수는 큰 잔치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다. 지금으로 치면 큰 음식점 요리사다. 안반은 커다란 도마에 해당된다. 요즘은 중국집에서 반죽을 쳐대 면발을 늘일 때 쓰지만 예전엔 도마나 떡판으로 많이 쓰였다. 안반은 느티나무로 만든 것을 최상으로 쳤지만 피나무 역시 나이테가 조밀하고 터지는 일이 적어 안반재로 널리 쓰였다. 썩 좋은 안반을 쓰면서도 안반이 별로라서 일이 더디다고 탓하는 것이다. 실력이 꾸준하지 못하고 기복이 심한 주방장은 짜증을 낸다. “칼이 왜 이 모양이야!” 조수는 생각하죠. ‘당신이 그 모양이야.’
 


내 방에는 소반 하나가 놓여있다. 무늬가 은은하고 촉감이 부드럽다. 소위 개다리 밥상이다. 12각형 피나무상이다. 피나무상이 아니면 행자상이라고 할 만큼 상 재료로 널리 쓰인다. 소반은 딸이 오래전에 생일선물로 직접 만들어준 것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다.  

엊그제 친구와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늦은 시간 아산 영인산에 갔다. 바람을 쐬면서 더위도 피할 겸 나섰다. 천천히 여유를 부려보며 산책을 했다. 이곳은 철따라 아름다운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곳이다. 그런데 6월 중순의 영인산은 녹음만 성성했다. 한참을 걷노라니 윙윙 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무슨 함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마치 아우내장터의 함성 같기도 했다. 
 


꽃은 보이지 않으니 의심은 엉뚱한 곳에 닿았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환한 꽃을 피운 커다란 나무가 우뚝 서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피나무가 아니던가. 꽃에서는 달콤한 꿀 향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나는 좋아하는 나무가 참 많다. 피나무도 그중에 하나다. 피나무를 보니 불현 듯 개다리소반이 떠올랐다. 칠예를 공부한 딸이 피나무로 만든 출품작인데 생일선물로 준 것이기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피(皮)나무는 껍질이 나무이름이 될 만큼 껍질에 특징이 있다. 옛날에는 아름드리 피나무가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수탈당하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목재와 껍질의 쓸모가 많아 수난을 당했다. 현재로는 우람한 사이즈의 피나무는 드물다.
 


껍질은 섬유질이 강인하고 삼베보다 더 질기며 물에도 잘 견디므로 옛날에는 생활에 크게 기여했다. 나무껍질로 기와 대신 지붕을 잇기도 하고 껍질의 내피섬유로 천을 짜서 술이나 간장을 걸러내는 자루를 만들었으며, 포대를 만들고 지게의 등받이로도 사용했다. 노끈, 새끼, 로프, 어망으로 만들어 썼다.
  
피나무 목재의 특성은 연한 황색으로 가벼우면서도 결이 치밀하고 무른 성질이며 곧게 자라서 예로부터 다양한 가구로 쓰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쓰임새는 궤짝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궤짝도 대부분 피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이나 불경을 얹어두는 상과 밥상, 교자상, 두레상을 만들었다. 국내의 전통 목각주로 피나무를 사용했다. 우리나라 목조 문화재의 나무꽃 조각은 그 섬세함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또한 서대문이라고 부르는 돈의문 현판도 피나무로 만들어졌다. 피나무는 비자나무, 은행나무와 함께 질 좋은 바둑판 재료로도 유명하다. 요즘은 바둑판을 만들 수 있을 만한 굵은 피나무가 드물어 가짜가 많다고 한다.
  


피나무는 밀원식물로도 유명하다. 5월은 아카시, 6월은 밤꽃, 7월은 피나무가 주 밀원이었다. 꽃자루에 달린 포의 독특한 생김새와 함께 나무 옆을 스치기만 해도 꿀 냄새가 진동해 꿀벌들이 많이 모여든다. 서양에서는 비트리(Bee tree)라고도 부른다. 고등학교 후배들이 충북 영동에서 양봉사업을 하고 있다. 그곳에 밀원용으로 피나무 숲을 1만평 조성했다고 한다. 
  
목재로뿐 아니라 가로수나 공원수로도 쓰인다. 영인산 공원에도 공원수로 자리하고 있어 마침 꽃이 핀 날에 만난 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윙윙거리는 많은 벌들이 얼마나 보기 좋든지! 동지섣달 꽃 본 듯이! 요즘 몇년동안 벌들이 급감하여 생태계가 무너질까 많은 걱정을 하는 터이기 때문이다. 
  
꽃말이 ‘부부애’인 피나무는 피나무과 낙엽활엽교목으로 달피나무라고도 한다. 높이는 20m까지 자란다. 잎은 길이 3~9cm의 넓은 달걀 모양이다. 잎 끝이 급하게 길어져 뾰족하고 밑은 심장 모양이다.
  
피나무의 독특한 특징은 무엇보다 열매를 친다. 주걱 모양의 포에 굵은 콩알크기의 열매가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려 열린다. 바람에 열매가 떨어지면 헬리콥터 날개처럼 빙글빙글 날아가는 모양도 재밌다. 간혹 피나무와 보리수를 같은 나무로 치는데 잘못된 정보다. 부처님이 수도했다는 인도보리수와 잎이 비슷한 피나무를 사찰에 심어 같은 나무로 전해진 까닭이다. 사찰 마당에 피나무 열매 속의 단단한 씨를 꿰어서 염주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 총 9종이 자생하는데 6종이 우리나라 고유종이다. 모양이 비슷해 전문가가 아니면 구별이 어렵다. 피나무는 장마철에 보통 꽃을 피우는 특성이 있다. 종자의 결실이 적어 대량증식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기후의 변화 탓인지 올해는 6월 하순도 되기 전에 꽃물을 올렸다. 알면 알수록 좋은 피나무는 생김새나 쓰임새에 버릴 것이 없다. 쓰임새가 좋으니 보호하지 않고 마구 베어 써버려서 이젠 만나기 어려운 나무가 되어 버렸다. 못내 아쉽다.  

  
  나무 닭을 만들어서 선반위에 얹어놓고
  나무 닭이 울거들랑 임은 그제 늙으소서

 

우탁(역동, 1263~ 1342) 선생이 지은 고려가요가 떠오른다. 피나무로 깎고 다듬은 닭을 어머니가 거처하는 방의 선반 위에 얹어놓고 지은 노래이다. 
  
나무닭이 울지 않으면 어머니는 영원히 늙지도 않을 것이란 바람을 담아 쓴 것이다. 나무닭은 영원히 울지 않지만 세월은 봄 동산 눈 녹인 바람 긴 듯 불고 간데없이 야속하게 지나버렸다. 어머니의 머리에도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이마에는 깊은 골이 패였다. 역동 선생의 효성이 지극했다.
  
어느덧 찌들은 나의 삭신은 정확하게 일기예보를 한다. 나무닭이 만들고, 봄동산 눈 녹일 바람을 잠깐 빌어다가 어머니의 머리에 내린 해묵은 서리를 녹여드리고 싶으나 어머니는 곁에 안 계시니 이런 바람조차 할 수 없으니 가슴이 저려온다.   
 

-참고문헌
1.《궁궐의 우리나무》 박상진
2.《한국산 유용수종의 목재성질》 국립산립과학원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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