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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다래와 K박사

임낙호(천안·수필가)

등록일 2023년08월03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임낙호 수필가> 새벽 산책길, 산을 넘어 호수를 향했다. 각종 약초와 나무를 기르는 곳으로 접어들었다. 엄나무, 옻나무, 포도, 다래, 머루 등 수십 종은 됨직했다. 그중에 눈에 들어온 것은 다래 열매였다. 이런 곳에서 다래를 만나다니. 
 


북한산을 이 잡듯 오르내리던 때가 있었다.헤아려 본다면 수천번은 될 것이다. 산악회 이름을 달고 자주 오르게 되었지만, 혼자 혹은 둘이 오르내린 횟수도 상당했다. 젊은 시절이었기에 겁 없이 다녔었다. 

그중에 K 박사와 둘이 했던 산행은 쥐다래에 대한 추억으로 남았다. 

어느 가을날 북한산 밤골계곡을 지나 사기막골 길을 넘어 육모정 계곡을 향했다. 7부 능선 일곱고개를 넘어야 닿을 수 있는 곳. 깊은 계곡, 인적 없고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만 들리는 고즈넉한 곳. 도중에 더덕, 도라지 등 약초도 지천이었다. 

산목련 피는 육모정 계곡에 도착했다. 수정보다 맑은 물이 흐르고 목련나무는 이미 노란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을 정취에 취해 주위를 둘러보는데 전에는 못 보던 다래넝쿨이 언뜻 보였다. 멀리서 보고는 알 수 없는 일, 다가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조그만 열매들이 옹기종기 매달려 있지 않은가.

다래와 비슷한 쥐다래 넝쿨이 아니던가. 나는 “다래다” 소리쳤다. 친구도 달려와 따먹어보자고 했지만 높아서 쉽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몇 개를 주워 먹어보니 정말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어렸을 때 먹었던 그 맛이었다.

그곳 쥐다래에 대한 아쉬움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이제는 그곳에 갈 기약이 없다. 코로나 시국까지 더하며 갇혀 지내는 사이 나이는 들어가고 다리 힘은 빠져갔다. 동행하던 K 박사의 체력이 눈에 띄게 감소되었다. 지난 추석 무렵 코로나19를 앓고 회복됐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그는 등산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건강했던 사람이었다. 산악지리에도 밝은 내비게이션이었다. 그런데 몇 백 미터도 못 가고 다리가 아프다며 걷다서다를 반복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다리에 쥐가 자주 났다. 전에도 정강이에 쥐가 나서 고생한 적이 있긴 했었지만, 이렇게 종아리에 쥐가 심한 적은 없었다며 맥을 못 추니 낯설게 느껴졌다. 쥐다래를 먹어서일까라는 뚱딴지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정기건강검진을 받아보았다. 의사로부터 입원준비를 해서 오라는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의사는 다급한 말로 헤모글로빈 수치가 너무 낮다며 수혈의 권유했고 수혈 후 며칠이 지나도 큰 호전이 없었다. 다시 수혈과 검사를 거듭하며 조혈상태를 체크했으나 나아질 기미는 없어 보였다. 다른 병원에서도 검사를 받았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급성백혈병이었다.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틈틈이 치료과정의 소식을 전해왔다. 꽃과 산을 사랑하는 그였기에 철따라 피는 꽃과 변하는 산을 담아 사진을 보내주며 나도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는 희망 섞인 투병 의지로 답을 해줬다. 식사도 제법 잘 하여 체중도 늘고 면역도 좋아졌다는 말에 한시름 놓기도 했다. 

그런데 잘 되어가던 소통이 어느 날 툭 끊겼다. 치료가 잘 되는 줄로만 알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울렸다. K의 부인이었다. 

“조금 전 운명했습니다. 장로님께 제일 먼저 전해드립니다.” 예상치 못한 비보에 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더 이상 말을 이을 힘도 없었다. 갑자기 혼이 빠진 듯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상주의 말에 충격을 주체하지 못했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장례식장 등 현안을 얘기하고 지인들 연락방법과 나의 범위 밖 인사들 연락할 방법도 나름 얘기해줬다. 

항상 재치있는 얘기로 즐겁게 해주던 사람이 영정 속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웃는 모습이 생전에 아픈 일 없던 사람처럼 보였다. 항상 여유로웠고 긍정이 트레이드마크였던 그였는데. 

그런 그가 왜 그런 병을 앓았을까. 짐작컨대, 그는 늦은 나이에 베트남의 초대형 건설프로젝트 건설사업관리(CM) 총괄책임자로 근무했던 적이 있다. 원활하지 못한 현장에서 자금난까지 겹쳐져 어려움을 겪었다. 젊었던 때와 달리 열대기후에 견디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장은 마무리도 못한 채 건강만 해치고 귀국했다. 그 후 위암으로 시련도 겪었지만 잘 극복했다. 그런데 이번엔 사달이 나고 말았다. 늘그막의 시련이 돌이킬 수 없는 병마의 원인이 된 건 아니었을까. 

산행하며 《도덕경》의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를 얘기하며 지내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자신의 신변이나 지식을 좀처럼 내세우지 않는 진중한 성격이 장점이었다. 내가 아는 현세의 어느 지식인보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하나님은 이런 귀한 인재를 왜 서둘러 부르셨을까. 저승에서 쓰실 일이 더 많으셨을까. 이대로 보낼 수 없어 길을 막고 떼라도 쓰고 싶었다. 그런다고 다시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어린애 같은 부질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그랬다. 보내야 했다. 

“잘 가시게, K박사! 암도, 고통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지내시게.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합시다.”

그날의 일이 어제인 듯 선명하여 산책길 다래나무를 부여잡고 한참을 서있었다. 눈물이 다래 열매같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다시는 볼 수 없는 K가 너무나 그리웠다.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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