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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아야꼬의 ‘이 질그릇에도’를 읽고

일본소설가 미우라 아야꼬의 작품…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여정 

등록일 2023년08월08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임낙호 천안수필가> 추수 끝난 들녘은 허허로웠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김장을 마치면 월동준비는 끝이었다. 아직 한 가지 일이 남아있다.

어머니와 누나는 하루종일 멥쌀 찹쌀을 빻고, 팥고물, 호박꼬지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장독대의 가운데 잘 모셔두었던 시루를 꺼내와 정성스레 닦아놓으면 준비 끝이다. 그 시대의 시루는 질그릇의 대명사였다. 조금만 방심하면 와르르 깨지기 쉬우니 신주단지 모시듯 해야 했다. 
 
시루는 농촌의 1년을 화룡점정 찍는 귀한 그릇이었다. 한해의 길고 긴 날을 농사짓느라 애썼던 것에 대한 보상의 상징이었다. 농사가 잘 되었음에 대한 감사였다. 함께 농사에 동참한 이웃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기회였다. 이때가 바로 시루의 진가를 발휘할 때였다. 
  
어머니는 정성껏 시루를 닦아서 한쪽에 모셔놓고 바닥에 뚫린 7개의 구멍을 삼베천으로 막고 악귀를 쫓는 빨간 팥고물과 하얀 쌀가루를 번갈아 가며 시루를 채웠다. 가마솥 위에 정성스럽게 올렸다. 솥과 시루의 사이는 김이 새지 않도록 시룻번으로 단단히 발라서 메웠다. 아궁이에 불이 지피면 가을 떡은 익어갔다. 
  
그 많던 질그릇은 주거환경과 생활패턴이 바뀌며 많이 사라졌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질그릇이 떡시루로 많이 사용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시루떡이 얼마나 맛있는지 먹어본 사람은 알기 때문이다. 도시의 아파트는 떡시루를 밀어냈다. 떡은 떡집에서 전담하는 형태가 되었다.
  
진짜 시루는 ‘기와 와(瓦)’자를 부수로 한 ‘시루 증(甑)’자로 쓰는데, 지명 말고는 쓰임이 적다. 매년 같이 먹자고 설 떡을 찌는 시루나 그런 풍경도 사라져가니 다수가 동시에 구하는 세시증(歲時甑 설날에 먹는 떡을 찌는 시루) 같은 말도 사라진 듯하다.
 


전직 교사였던 미우라 아야꼬는 남편 미우라 미쯔요와 잡화상을 운영하는 평범한 주부였다. 아사히신문사의 공모전에 당선된 소설 《빙점》을 1964년 출간하여 일본을 비롯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일본의 기독교인 대표적 여류작가가 되었다. 아야꼬의 《길은 여기에》의 후속작품 《이 질그릇에도》를 읽었다. 《빙점》의 탄생 전 얘기가 담겨있다. 

“아야꼬, 하나님은 우리가 잘 나서 써 주시는 게 아니야. 성경에도 있는 것처럼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진 ‘질그릇’에 지나지 않아. 이런 ‘질그릇’이라도 하나님이 쓰시려 할 때는 반드시 써주신다. 앞으로 자기가 ‘질그릇’임을 결코 잊지 않도록.”
  
《이 질그릇에도》는 기독교로 가치관이 변해가면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여정의 스토리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살면서 진실이라고 믿었던 가치와 세계관이 무너지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일본이 패전으로 그동안 잘 살아왔던 세계가 얼마나 편협하고 잘못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미우라 아야꼬는 일본 천황을 숭배하며 아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자신의 행위를 뼈저리게 후회했다. 믿었던 가치가 진실이 아니었고, 죄악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삶은 무너져 내렸다. 육신은 병들어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열정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며 열심히 살아왔던 생은 허무감에 휩싸였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여겨졌다.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다.

절망 속에 육신까지 병들어 죽음을 바라던 그녀를 빛의 길로 인도한 이가 아야꼬와 같은 카리에스(결핵척추염)를 앓고 있던 마에카와 다다시였다. 그는 “아야꼬가 살 수만 있다면 내 목숨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미우라 아야꼬는 ‘그의 사랑이 온 몸을 꿰뚫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마침내 다다시가 믿는 주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다시는 아야꼬를 놔두고 결핵과 싸우다 주님의 품으로 일찍 떠났다. 그래서일까. 아야꼬는 폐결핵에서 회복이 되어갔다.
  
그녀는 다다시와 닮은 남자 미우라 미쯔요를 만났다. 미쯔요는 5년간 아야꼬의 병수발을 들었다. 아야꼬의 병이 나았다. 사랑, 결혼으로 이어지고 가정을 꾸몄다. 아야꼬가 소설 《빙점》을 탄생시키기까지의 스토리가 감동적이었다. 
  
아야꼬의 삶은 육신의 고통으로 주님을 원망할 법도 한데, 하나님이 질그릇 같은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감사할 뿐이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확신을 갖고 미우라와 서로 존경하며 믿음도 키워나갔다.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라는 야고보서 말씀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고난을 기쁘게 여기며 살아가는 아야꼬의 믿음은 기쁨의 열매를 맺었다.
 

#1 운영하는 잡화점에서 주류를 팔아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상황. 아야꼬는 돈을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고 시누이를 학교에 보내는 선한 목적으로 쓸 생각이었다. 남편에게 얘기했지만 거절당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쁜 목적으로 쓰일지라도 과정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해야 한다. 재정적 필요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채워주실 것이다. 아야꼬는 남편의 말에 순종하며 마음이 편해졌다.

 #2 또 잡화점을 운영하는 동시에 아야꼬는 신문사에 제출해야 하는 소설쓰기도 힘든 상황.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한 감기 때문에 며칠을 앓아누웠다. 12월31일은 소설의 마감날이었다. 게다가 매년 12월31일 그녀의 집에서 어린이 크리스마스행사를 해왔었다. 소설 마감시간도 촉박하고 너무 힘든 상황이라 행사를 미루고 싶어 남편과 상의했다. 남편은 단번에 거절하며 하나님을 첫째로 생각하는 것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임을 강조했다.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소설을 제출하지 않아도 좋다고까지 했다. 남편에 순종하여 어린이 크리스마스행사를 열었다. 마감일에 소설도 제출할 수 있었다. 당선되었다.


남편 미후라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렸을 것이다. 깨질 것 같던 아야꼬의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산 보상으로 《빙점》이 명작이 되고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다. 깨지기 쉬운 시루에서 맛있는 떡이 익듯이. 
  
어머니가 해주셨던 팥 시루떡이 먹고 싶은 밤이다.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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