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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멀미'

임낙호(천안·수필가)

등록일 2022년04월11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정신이 혼미합니다. 눈 앞을 누가 온통 분홍물감으로 흩뿌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온 천지가 핑크빛입니다. 관악산 줄기의 호젓한 산길에 누가 어느새 이렇게 붉게 피웠을까? 꽃 한 웅큼 어루만져 봅니다. 피기 직전 터질 듯 부푼 봉오리를 또 살며시 잡아봅니다. ‘부푼 처녀 가슴의 봉오리를 만질 때의 느낌’이라는 누구의 말을 생각하며 말입니다.

눈이 닿는 곳마다 온통 분홍빛이니 실바람에 실려오는 빛도 온통 분홍이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진달래꽃에 취해본 적이 있었던가. 매년 맞이하는 연례행사이건만 오늘같은 경험이 있었던가. 바다낚시를 나가 일행들 모두 배멀미로 나가떨어져도 나는 꿋꿋하게 낚싯대를 잡고 찌에 눈도 떼지 않고 있었는데, 고소공포증조차도 느끼지 않았는데, 그런 내가 심하게 멀미를 하고 신음하는 중입니다. 이 분홍색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멀미를 하고 있습니다. 미쳐버리겠습니다.


 
   진달래 / 김용택
 

  연병헌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어지러워라 환장허것네
  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불것다 시방

 

헤어날 길이 없나이다. 누구 없소. 내 꽃멀미를 달래줄 이가 진정 없소. 김 시인도 나와 같은 처지였나보다. 더 정신을 못 차리고 멀미에 취해있으니 말이다. 꽃봉오리를 만져보고 시(詩) 속에 녹여내지 못하고 진달래에 취해 환장할 지경까지 간 것인가. 그 마음 이해할 만도 하다. 이럴 때는 가슴을 팍 터뜨리고 뛰쳐나오고 싶었겠지만 그러지 못했구나. 

‘나 또한 주체하지 못하고 산 중턱에 쓰러져 부렀다. 그러니 이게 다 내게 닥친 일인기라. 왜 우리는 이럴 때 봄바람이라고 말도 못하고 살아왔을까.’
 


어제는 호숫가로 끌려갔었다. 서울에서 점령군처럼 몰아닥친 늙은 사내들에게 무지막지하게 호숫가로 납치 아닌 납치를 당했다. 끌려가자마자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바구’의 말펀치에 맞고 꽃바람에 맞고 봄눈처럼 내리는 꽃비에 수없이 펀치를 맞고 실신하고 말았었는데. 흩날리던 벚꽃이 정신을 못차리게 해 열병같은 꽃멀미로 밤을 설치게 하지 않았던가. 

벚꽃 멀미가 깨기도 전에 오늘은 아침부터 진분홍 진달래가 나를 산허리에 넘어뜨리고 말았으니 일어날 힘도 없구나. 낚싯배에 쓰러진 사람들을 보며 무시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던 내가 보기 좋게 꽃멀미에 당해 쓰러지고 말았으니 그 꽃 펀치가 얼마나 셌는지는 가히 잠작조차 힘들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골목길 한 켠에 화분에 심어놓은 제법 키가 큰 진달래를 만났다. 신기해서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 주는 아주머니가 속삭이듯이 도란도란 얘기한다. “지난해 낭군님 산소에 갔다 옮겨온 건데 죽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서 꽃을 피워주었네. 고맙고 곱디곱기도 하지. 이 고운 꽃을 몇번이나 더 볼 수 있을지.” 

불그스름한 골목에서 만난 꽃이 나를 붙잡는 듯했다.  

유년시절 어머니를 따라다닐 때가 회상된다. 어머니는 뒷동산 앞동산에 질펀하게 핀 진달래를 보시며 “아들아, 내가 사는 동안 몇 번이나 이 꽃들을 볼까. 순간 피었다가 저버리는 꽃은 꼭 오늘같다. 우리는 오늘 이 생애 단 하루인지도 모르고, 금방 저버릴 줄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보내버리곤 하니까. 무럭무럭 자라서 애쓰며 피어난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도 모르고, 사는 거 바쁘다고 힘들다고 바닥만 보다가 하루를 지나쳐 버린다.”라고 자주 하셨던게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때의 어머니보다 나이를 훌쩍 넘은 나이에 철이 드는 나 자신을 보고있다. 

어느 소설속의 할머니 말도 떠오른다. “아가, 꽃 봐라. 속상한 거는 생각도 하지 말고 너는 이쁜 거만 봐라.”  

격하게 꽃멀미한 오늘은 속상한 거 힘든 거 생각말고 바깥에 핀 봄꽃 실컷 구경하며 보내라고 모두에게 강하게 안부를 띄우리라.


▲ 임낙호(천안 수필가)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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