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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동북지역의 의병대장 강기동 선생

2월의 독립운동가 강기동(1884.3.5~1911.4.17)

등록일 2011년02월08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강기동 선생.
독립기념관(관장 김주현)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강기동(姜基東)선생을 2011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2월 한달 간 야외전시장에서 개최한다.
전시회에는 일제헌병소에 피체돼 있던 의병을 직접 탈주시킨 선생에 대한 일제 보고문서 등 관련자료 10점이 전시되며, 독립기념관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관람할 수 있다. 

선생은 1884년 서울 명동에서 출생했는데 자세한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성장 후 일본군 기병대에 입대했고, 일본어에 능통한 것을 계기로 헌병보조원으로 발탁돼 경기도 양주군 고안헌병분견소에서 근무했다.
의병들이 수감되는 것을 보고 일제의 의병탄압 실상을 접한 선생은 길인식 등 2명의 의병을 탈주시킨 후 총과 탄환을 탈취해 의병장 이은찬이 이끄는 창의원수부에 참여해 의병으로 대일전쟁에 투신했다.

선생은 헌병보조원 시절의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 군대와 헌병 내부의 사정을 제공함으로써 창의원수부의 반일 투쟁에 많은 공헌을 했다. 이러한 공로로 1909년 2월 경 의병장 이은찬의 부장으로 임명됐다.
창의원수부는 1909년 2월 양주군 항동 부근의 돌압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작전으로 이은찬이 체포되면서 와해의 위기를 맞이했다. 선생은 양주의 각 지역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고 흩어진 의진을 수습했다. 또한 연기우 의병부대와 연합부대를 구성해 포천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피해 무장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북간도로 망명해 독립군으로 전환하고자 했으나 1911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일경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됐다. 그리해 4월 17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 용산 일본군 행형장에서 총살·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정리/이진희 기자>

강기동 선생이 길인식 의병을 탈주시킨 내용을 보고한 일제문서(1909년 2월)

이진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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